비 오는 날이면 우리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며 빗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우산 위로 스치는 물방울, 젖어드는 도시의 풍경은 우리의 내면을 촉촉이 적시며 감성의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때로는 지나간 추억을 되살리고, 때로는 미처 다하지 못한 감정을 토해 내기도 합니다.
이 포스트에서는 한국 현대시인들의 대표적인 ‘비에 관한 시’를 엄선하여 모아 보았습니다. 시마다 다른 시선으로 빗속의 풍경과 감정을 풀어놓은 작품을 감상하시며, 비 오는 날의 다채로운 정서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이상희 시인은 빗속 자연의 다양한 반응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빗줄기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 물총을 쏘듯 튕겨 나오는 물방울, 그리고 비를 맞으며 태연한 나무의 모습은 우리 내면의 다양한 감정 상태를 은유합니다.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창문을 두드리는 단 하나의 빗방울로 우리의 소망과 갈망을 상징합니다. 그 소리는 일상 속에 놓인 작은 기적과도 같아, 시인은 빗소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을 두드려 보라고 권유합니다.
내 마음을 통째로
그리움에 빠뜨려 버리는
궂은비가 하루종일 내리고 있습니다.굵은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고 부딪치니
외로워지는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비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면
그리움마저 애잔하게
빗물과 함께 흘러내려
나만 홀로 외롭게 남아 있습니다.쏟아지는 빗줄기로
모든 것들이 젖고 있는데
내 마음의 샛길은 메말라 젖어들지 못합니다.그리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눈물이 흐르는 걸 보면
내가 그대를 무척 사랑하는가 봅니다.
우리 함께 즐거웠던 순간들이
더 생각이 납니다.그대가 불쑥 찾아올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대가 보고 싶습니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비에 빗대어 표현한 시로, 빗소리가 곧 사랑의 부름처럼 들려옵니다. 시인은 흠뻑 젖은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빗물처럼 번져 가는 연정을 고백합니다.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군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강렬한 감정의 분출과 포근한 위로를 동시에 담은 시입니다. 천양희 시인은 마음속 감정이 비처럼 퍼붓고 싶다고 노래하며, 독자에게 진솔한 자기 고백의 순간을 선사합니다.
소나기같이 내리는 사랑에 빠져
온몸을 불길에 던졌다
꿈과 이상조차 화염 회오리에 녹아 없어지고
나의 생명은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이 되어 이글거렸다.오래지 않아 불꽃은 사그라지고
회색빛 흔적만이 바람에 날리는
그런 차가운 자신이 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누구라도 그 자리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순간의 눈빛이 빛나는 것만으로
사랑의 짧은 행복에 빠져들며
수많은 내일의 고통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 폭풍 지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자리
나의 황폐함에 놀란다
이미 차가워진 자신의 내부에서
조그마한 온기라도 찾는다
겨우 이어진 목숨의 따스함이 고맙다이제는 그 불길을 맞을 자신이 없다
소나기보다는 가랑비 같은 사랑
언제인지도 모르게 흠뻑 젖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반갑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잔잔함을 지닌 채
다가오는 가랑비
한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그대의
여린 날갯짓이 눈부시다
은은한 그 사랑에 젖어있는 미소가
가랑비에 펼쳐진다
격정적인 사랑(소나기)과 부드러운 사랑(가랑비)을 대비시키며,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깊이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짧고 강렬한 감정 너머에 남는 잔잔한 온기를 더욱 소중히 여길 것을 말합니다.
자연 풍경과 위로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봄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삶의 의미와 평온을 찾는 시입니다. 차분히 빗속을 걸으며 자아를 돌아보고, 자연과 동화되는 위안을 느끼게 합니다.
나뭇잎 씻어줄래
투명하도록 푸르게 씻어줄래
푸른빛 타오르게 불태울래
벌들의 몸에도 붙어 반짝이며 날아갈래
죽은 나무에도 척 붙어 쓰다듬을래
바위에도 내려앉을래
거름더미에도 내려앉을래
눈부시게 만들래
노란 꽃처럼
한 송이 노란 꽃처럼
세상을 그렇게 만들래
비가 그치고 난 뒤 찾아오는 맑은 공기와 햇살을 화사하게 묘사한 시로, 빗물에 씻겨 더욱 선명해진 색을 통해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전합니다.
무슨 전조처럼 온종일 가을비가
구슬프게 주룩주룩 내린다
…
언젠가는 나의 혼도 그렇게
가을비 속에 나를 버리고 어디론지 훌쩍 떠나 버리겠지
가을비가 주는 쓸쓸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서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존재, 그리고 남겨진 가을비의 감촉이 시인의 사유를 깊게 만듭니다.
위태로운 심상의 비유
꼭두새벽부터 장대비 내립니다
이렇게 하면 속 시원하냐 하며
으스대듯 내립니다.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강바닥을 위해시름의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는
환자들을 위해
너희들 울음 쌓느라 애쓰고 애썼다며
으스대며 장대비 시원하게 내립니다.하나에도 벅차고
지키기 힘든 사랑도
장대비 같이 와~하며
몰려와도 좋을 것 같습니다.여름은 이래서 좋고
장대비도 이래서 더욱 좋습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여름 장대비를 사랑과 인생에 비유해, 폭풍 같은 순간에도 그 안에서 얻는 해방감을 그립니다.
가기 싫어 울던
그 땅 위에
꽃비 내린다가면 또 그만인 길
한 많은 길 위에
춤추는 살풀이그리도 너 좋아하던 비였지만
비 오지 않는 날은
하루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는
미안한 내 얼굴에
피가 흐른다
잔잔한 보슬비 속에서 과거의 미련과 후회를 떠올리며, 비가 주는 회상과 자아 성찰의 순간을 포착합니다.
젖고 있었다
아니 젖는 듯 젖고 있었다간간이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거꾸로 된 세상이 온통
떨어지며
박살이 나고 있었다남의 이야기 듣는 듯 내가
내 가슴의 이야기 들어야 하는
어느 날의 목마름
가늘게 내리는 이슬비에 자신을 빗대어, 내면의 목마름과 고독을 성찰하는 시입니다.
비 오는 날의 시들은 모두 빗소리와 풍경, 그리고 내면의 감정을 매개로 우리에게 특별한 울림을 선사합니다. 시마다 다른 시선으로 묘사된 빗속의 순간들을 감상하며, 여러분도 창밖으로 내리는 빗줄기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비가 그치는 순간, 우리 마음에도 새로운 색채와 향기가 물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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